[Life of Pi] 어른들을 위한 잔인한 동화
Posted on 2013년 2월 3일
“폭풍우로 인해 가족을 모두 잃고 탈출용 배에서 홀로 살아남아 끝없이 펼쳐진 대양에서의 생존기를 담은 영화”
영화를 보기 전에 포스터를 통해 알 수 있는 영화 정보였습니다. 사실 지인의 추천도 있었지만,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진 않았었죠. 3D아이맥스 안경을 끼고 자리에 앉았지만 영화 도입부는 여타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3D영화 특유의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했고, 기대감을 갖게 하는 영화적 장치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초중반부에 접어들면서 힘을 받기 시작합니다. 대략 영화 시간의 80%이상을 차지하는 대양 생존 씬에서 캐릭터라고는 호랑이한마리와 간혹 울부짖는 동물 두어마리, 심심찮게 등장하는 물고기를 빼고는 너무나도 단촐한, (당연한 얘기지만 이녀석들은 대사도 없습니다.) 등장인물만으로 영화는 놀라울만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1. 과장되지 않은 3D의 황홀함
영화 <아바타>를 두번 보았습니다. 아이맥스 3D 스크린에 펼쳐지는 판도라 행성의 황홀한 영상미에 푹 빠져 영화속의 배우가 뭐라고 떠들던, ‘아 조용히좀 해봐’라고 맘속으로 주인공에게 외치며, 미술관의 작품이라도 감상하는 것 마냥 정신을 잃게 만들었었던 영화였습니다. 해서 그 단순한 서사조차 맥락을 놓쳐버리게 만든 영화가 아바타였다면, 다시한번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영화<아바타>에서 판도라 행성을 처음 보았을때의 그 황홀함을 선사해 줍니다.
특히 압권은 밤바다의 해파리떼와 고래씬이 나오는 장면인데.. 투박한 색감과 영상이 어느순간 ‘어랏.. 어어랏..?’ 하며 정신을 잃게 만드는 놀랍고 황홀한 장면이 되었다가, ‘뭘 그렇게 감탄 하는거야. 여긴 땡볕이 내려쬐는 태평양 한가운데라고, 더군다나 넌 호랑이와 함께 있어’ 라며 현실을 깨닳게 해주는 ‘이안’감독의 이러한 연출력은 강력한 몰입을 선사해 주는 대표적인 테크닉이자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2. 함축된 메타포의 자연스러운 버무림
폭풍우로 인해 배는 침수됩니다. 파이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가족이 있는 객실로 내려가는데 분명히 우리에 있어야 할 동물들이 떠내려 옵니다. 가족의 생사는 확인도 못하고 갑판으로 올라오지만, 동물들이 어디서 풀려났는지, 사람들과 뒤섞여 난리통을 벌입니다.. 영화는 파이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이같은 의도적 허술함(?)을 보여줌으로써 영화가 비유와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저기 죄송한데, 오랑우탄이 바나나를 타고 오셨다고 했는데, 바나나는 물에 뜨지 않아요. – 파이의 이야기를 듣던 보험회사 직원의 의문
얼룩말과 함께 홀로 보트에 올라탄 파이는 격랑 속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 노를 내미는데, 가까이 다가오니 ‘사람’이 아닌 동물원에서 키우던 호랑이 ‘리처드 파커’ 입니다. 폭풍우가 거치고 하늘이 갠 후 ‘리처드 파커’는 보이지 않고 보트의 절반을 덮은 천 속에서 하이에나 한마리가 튀어나오죠. 하이에나는 약에 취해 구토를 하고, (분명 폭풍우 전에 파이의 아버지는 하이에나가 아닌 오랑우탄에게 약을 주사함) 그 와중에 오랑우탄이 배에 올라탑니다. 하이에나는 이후 정신을 차리고,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숨어있던 뱅골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배를 뒤덮고 있었던, 비좁은 천속에서 튀어나와 하이에나를 공격합니다.
영화는 뱅골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비좁은 공간에서 튀어나오는 장면을 영화 전체적인 영상흐름의 리듬을 해칠만큼이나 매우 의도적으로 이질적인 연출을했습니다. 관객들을 깜짝 놀래켜서라도 ‘자 지금부터 호랑이가 등장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다고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이맥스 큰 스크린을 호랑이 얼굴 하나로 뒤덮으며 상당히 급작스럽게 앵글을 전환합니다.
천속에 숨어있던 ‘리차드 파커’는 결국 파이 자신의 또다른 공격적 본성을 의미하는데, 하이에나로 묘사된 요리사 인간이 오랑우탄으로 묘사된 자신의 엄마와 다리다친 얼룩말이었던 일본인 관광객을 죽이자 ‘무의식의 내면(천막)’에서 나오며 하이에나를 공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파이는 보트와 줄 하나로 연결된 뗏목을 만들어 리처드파커와 함께하지만 결국 일정 이상의 거리를 두며 외로움과 배고픔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며, 표류하게됩니다. 이는 자신의 본성과 악마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결국 함께할 수 밖에 없는 파이 자신의 갈등을 나태내는 하나의 상징으로 보여집니다.
3. 죄책감과 자기합리화
어렸을적부터 다양한 종교를 믿는 파이에게, 형은 비아냥거렸고 아버지는 이성과 과학적 측면을 강조하며 파이에게 “여러 종교를 다 믿는건 하나만 믿는것보다 못하다”라고 하며 질책했습니다. 하지만, 표류된 후 파이에게 있어 종교는 이성이고, 본성이 잔인한 현실이 됩니다. (시간이 흘러서도 파이는 여러 종교를 믿는 독실한 신자)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채식만 할정도로 살생을 금했던 파이지만, 잔인한 현실속에서 악마같은 모습으로 변해 요리사를 살인하고, 이런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해 비유와 상징적인 기나긴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특히 다시한번 폭풍우를만나(이때 신을 원망하며 ‘우린 죽고 말거야’라며 오열) 아름다운 무인도에 도착해 엄마의 품과 같은(실제 섬의 모양도 여자의 모습) 포근함과 안락함을 느끼지만, 사실은 아름다움속에 죽음이 깃든 살인섬이라는 사실을 깨닳고, 다시 리처드파커와 함께 바다로 나오는 장면은 결코 인정하지 싫지만 떨어 질수 없는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가게 되는 그리고 그 본성이 결국 파이의 목숨을 지켜었다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삶, 그리고 진실
멕시코 해안가에서 탈진한 상태로 파이는 사람들에게 발견됩니다. 이때 자신과 함께 했던 ‘리차드파커(=본성)은 뒷모습을 보이며 유유히 사라집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로군요.” “아니요. 그 다음은 당신의 이야기에 달렸소.” – 이야기를 마친 후 파이와 작가가 나눈 한마디
병원에 누워서 두명의 일본 보험회사 직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믿지 않는 그들에게 진짜 자신의 얘기를 합니다. 이때 파이의 절규하듯 말하는 그의 눈 속에서 이미 보냈지만, ‘영원히 함께(π)’ 할 수 밖에 없는 ‘리처드 파커’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듯 했습니다.
리처드파커는 자신이고, 결국 자신은 리처드 파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리차드 파커가 없었다면 난 벌써 죽었을 것이다. 저 녀석 때문에 늘 긴장할 수 있고, 저 녀석을 돌보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둔다. -표류중 파이의 일기
5. 결론
당신은 두 이야기중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 나이든 파이 파텔이 작가에게 하는 질문
영화의 중심을 관통하는 파이 파텔 혹은 리안감독의 물음입니다.
본성으로 대변되는 뱅골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해피엔딩이 되지만, 이성으로 대변되는 파이 파텔의 ‘진짜 이야기’가 우리네 인간사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에 참담함을 느낍니다.
결국 신문사에 전달된 사건의 헤드라인은 ‘아름다운 파이 파텔의 생존기’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며, 두 이야기를 들은 작가도 결국 ‘리처드 파커’가 등장하는 첫번째 이야기로 소설을 쓰게됩니다.
병원에서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오열하던 파이 파텔의 눈빛을 잊을 수 없습니다.
PS. 리차드 파커 이름의 유래
미뇨넷호 사건
19세기 영국에서 실제 벌어진 재판에 관한 이야기로 사건은 이렇다. 당시 발행된 한 신문은 사건의 이면을 자세히 소개했고 ‘미뇨넷 호 생존자의 이야기보다 더 슬픈 해난사고는 없었다’ 고 했다. 배는 희망봉에서 약 2000km 떨어진 남대서양에서 발견되었다.
배에 탄 건 4명이었는데 더들리는 선장이었고 스티븐스는 1등 항해사, 브룩스는 선원이었다. 4번째 승무원은 배의 잡무를 보던 17세 소년 리처드 파커였다. 파커는 고아라서 가족이 없었고, 배를 타고 장기간 바다에 나온 건 처음이었다. 사건의 정황에는 이견이 없었다. 파도가 배를 강타했고 미뇨넷 호는 침몰했다. 승무원 4명은 구명보트로 탈출했다. 식량은 마실 물도 없이 순무 통조림 두 개 뿐이었다.
처음 사흘간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넷째 날에는 순무 통조림 하나를 따서 먹었다. 그 다음 이튿날엔 거북 한 마리를 잡았다. 남은 순무 통조림 하나와 거북을 먹으며 승무원들은 며칠을 버텼다. 그 다음 8일간은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파커는 몸이 쇠약해졌다. 19일째, 선장인 더들리는 제비뽑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제비뽑기를 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어줄 사람을 정하자는 것이었다. 브룩스는 반대했다. 제비뽑기는 무산된다. 이튿날에도 구조해줄 배가 보이지 않자 더들리는 브룩스에게 고개를 돌리라고 말한 뒤, 스티븐스에게 파커를 죽여야겠다고 몸짓으로 말한다. 더들리는 기도를 올리고 소년에게 때가 됐다고 말한 다음 주머니칼로 소년의 경정맥을 찔러 죽였다. 양심 때문에 그 섬뜩한 하사품을 받지 않으려던 브룩스도 태도를 바꾸었고 나흘간 세 남자는 파커의 피와 살을 먹었다. 그리고 선원들은 구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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